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르 라보, 떼누아

category 가을 향수/Formal 2019. 8. 29. 21:44

Le Labo, The Noir29









베티버, 삼나무, 베르가못, 무화과



취할거 같은 우디향.


서늘한 날씨의 늦은 밤, 성과 같이 생긴 성당의 복도를 걷다 구도자의 방문을 살짝 열었을때 바람과 함께 흘러나올 거 같은 향내.


메마른 표면의 강건한 느낌의 원목 가구들,

집중을 위해 피워놓은 듯한 향내,

그리고 스치듯 지나가는 홍차향.


수수하지만 남루하지 않고, 진하지만 입체적이다.

이런 향을 풍기는 방의 주인은 누구인가 호기심이 동해 방 문 틈 사이로 시선을 집어넣어본다.
검은 수단을 입은 남자가 묵상을 하는 모습.
문이 열렸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인지 개의치 않는것인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.
그런 그의 등에 도도히 흐르는 촛불빛과 더해져 경건해진다.

방해하고 싶지 않은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복도에 퍼진 잔향을 맡는다.
그 잔향마저도 아우라같이 존재감을 발한다.
그게 떼 누아29.






저는 땀이 많은 편인데다 뚜벅이라 여름 향수는 많이 사지도 않고 보통 누가 차로 집앞까지 픽업해온다고 하지 않으면 뿌리지도 않는데,

최근 온도가 많이 내려갔습니다.

 

최고 온도 자체는 29~30도에서 왔다갔다하는 무더운 날씨이긴 해도 최고 온도까지 올라가기 전은 그나마 선선한 느낌이라 시원할때 이동해서 뜨거울때 시원한 실내에 짱박혀 있으면 땀은 거의 안날 정도의 날씨가 됐더라구요.

그 덕분에 가을 향수를 하나 둘 꺼내서 맡아보고 있어요.


그렇게 저번주 일요일 미사시간에 들고 나오게 된 향수가 떼누아였는데요.

이번 기회에 싸게 구매한 아이라 여기저기 자랑하러 다니고 싶은 이유가 컸습니다.


성당안에서 맡을 수 있는 미사 의자의 약간 메마른 나무향과, 성당 내를 시원하게 돌아다니는 약간의 습기, 큰 건물에서는 아무리 청소를 해도 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먼지냄새와 떼누아가 섞이니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동화될 수가 없더라구요.


여기에 화룡 점정으로 미사가 끝난 뒤에 신부님과 인사를 할때 이 향수는 나보다 신부님이 더 잘어울릴거 같다고 생각했어요.

해서무례를 무릅쓰고 뿌려도 될까 여쭈어보니 조금 당황하셨지만 이내 흔쾌히 승낙해서 뿌려드렸습니다.


이 향은 성직자나 인도어파 제복에 안성맞춤입니다.

차분하고 정갈해서 단정한 느낌의 제복 이미지를 업해주고요.

묵직하고 진하게 퍼지는 질감 덕분에 무게감과 카리스마가 더해져서 신뢰감이 느껴지는 향입니다.

또 마냥 무거운게 아니라 약간의 시원한 향도 더해져 있어서 마냥 꽉막힌 사람처럼 느껴지지도 않아요.


신부님이 뿌렸을때 너무 잘 어울려서 비유도 구도하는 성직자로 하게 되었는데요.

이 구도하는 뒷모습은 절박해서 세상의 모든 신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비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구도의 느낌입니다.

초연하게 자신이 믿는 더 높은 차원의 무언가에게 가야할 길을 묻는 느낌.

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.


이렇게 적고 있는 지금도 떼 누아를 뿌리고 생각을 정리합니다.

차분하게 가라앉아서 머릿속이 한결 수월하게 정리되는 것 같아요.

조금 더 시원해져서 떼 누아와 가을 향수장에 있는 아이들이 낮에도 당당할 수 있는 계절이 왔으면 좋겠네요.